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바르샤바 전투(1939년)|바르샤바]]를 향하여 ==== 9월 3일, 남부집단군의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제10군도 바르타(Warta)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2일 뒤인 9월 5일에 그의 좌익은 폴란드 중서부의 공업 도시 [[우치(폴란드)|우치]](Łódź)에, 우익은 키엘체(Kielce)에 도달했다. 우치 군이 북쪽의 포즈난 군과 동남쪽의 크라쿠프 군으로부터 양분되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공격을 받았고, 폴란드 야전군 가운데 가장 전력이 빈약했던 카르파티 군 또한 독일 제14군과 친독 슬로바키아군의 공격을 받고 니다(Nida)강과 두나예츠(Dunajec)강으로부터 밀려났다. 불과 1주일 만에 비스와강과 폴란드 중심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9월 8일, 우치가 격전 끝에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다. 해당 지역에 배치된 우치 군은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도 여전히 병력 동원이 진행 중이었다. 국경선 가까이 배치되어 있던 폴란드 3개 [[사단(군사)|사단]]은 독일군의 공세을 받고 얼마 가지 않아 붕괴됬다. 우치의 함락은 폴란드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는데, 포즈난 군과 [[크라쿠프]] 군 사이를 담당하고 있던 우치 군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뚫리면서 초기의 남부 방어 계획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에 대항해 선전하고 있던 다른 폴란드군이 연달아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타 지역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치가 함락된 당일 라이헤나우 휘하 기갑군단은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주했으며, 우익의 경사단들은 9일까지 바르샤바와 산도미에시(Sandomierz) 사이의 마을들을 점령했다. 그동안 [[빌헬름 리스트]] 휘하 제14군은 프셰미실(Przemyśl) 근교의 산(San)강 주변까지 진격했다. 같은 시기 북부 전선의 제19기갑군단은 나레프강을 도하하여[* 이 과정에서 9월 7일부터 10일까지 720명 규모에 [[대전차소총]] 2문으로 무장한 폴란드군에게 350대의 [[전차]]와 657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항공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던 42,200여 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3일 동안 쩔쩔매는 [[비츠나 전투]]가 벌어졌다.] 부크(Bug)강에 형성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초기의 국경전투(Bitwa graniczna)에서 연패한 폴란드군은 9월 6일 시미그위 원수로부터 비스와강과 산강을 따라 형성된 제2 방어선으로 퇴각하여 방어전을 개시할 것을 명령받았다. 폴란드군의 분전으로 몇몇 전선에서 전진이 조금 늦춰지기는 했으나 독일군은 예정된 계획대로 신속하게 진격했으며, [[바르샤바 전투(1939년)|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었다]]. 바르샤바에 형성된 12만 명 규모의 폴란드군 방어선은 주로 바르샤바 서쪽 외곽에 집중된 형태를 띠었으며, 바르샤바의 북쪽에는 빅토르 톰메 준장 휘하 4만여 명의 폴란드군이 방어하는 모들린(Modlin) 요새가 위치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출한 8일부터 바르샤바를 향해 공세를 게시했으나 폴란드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혔고, 독일 제31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은 제4기갑사단이 무리하게 바르샤바로 진입하려 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밀려나기까지 했다.[* 공장에서 가져온 테레빈유를 길거리에 쏟아 붓고는 전차대가 진입하자 불을 질러 버렸다.] 이후로도 제4기갑사단은 계속해서 바르샤바를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거듭할 뿐이었다. 이에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독일군 사령부는 외부에서 포위망을 형성하여 바르샤바 내에 [[융단폭격]]을 퍼붓고 외부로부터의 물자 반입 및 병력 증원을 차단시켜 바르샤바를 말려죽이는 작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르샤바 전투가 28일까지 상당히 치열하게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만 독일군의 전사자는 1,500여 명, 부상자는 5,000여 명에 그쳤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rszawa_obrona_1939.png|width=450]] ▲ 바르샤바 방어전의 형세. 푸른색이 폴란드군, 붉은색이 독일군이다. 정작 전투가 끝날 때까지 독일군은 바르샤바 시내에 한 발짝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한다. 뭐 대신에 외부에서 매일같이 [[융단폭격]]을 쏟아부었지만. [[바르샤바 전투(1939년)|바르샤바 공방전]]에 대해 첨언하자면, 초기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규군 병력은 4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중대밖에 없었고 이외의 병력은 2선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국경 전투와 브주라 전투에서 후퇴한 폴란드군이 합류하고 [[시민]] 자원병을 받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병력을 충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독일 총사령부는 8일에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승리한 게 아니라 대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뻘쭘해졌는지 바르샤바를 강력한 요새(Festung Warschau, 바르샤바 요새)라고 선전하면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정당화'''했다. 독일군은 고의로 바르샤바의 인프라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이탄]]까지 대거 들여와 바르샤바를 아예 전소시켜버리려 했을 정도였다. 한편 북부의 모들린 요새도 13일부터 [[헤르만 호트]] 휘하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15일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 동부로 진주하면서 바르샤바를 포위하는 형세가 완성되었다. 사실상 1주일 만에 폴란드군의 국경 방어 계획은 대실패로 끝나,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Wielkopolska), 상부 실롱스크(Górny Śląsk)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군은 바르샤바와 [[르비우|르부프]](Lwów, 現 [[우크라이나]] 르비우(Львів; L'viv))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다. 여기에 폴란드군은 나치 독일의 훈련을 받고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독일계 반란군[*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2천여 명의 독일 반란군이 전사했다. 전쟁 기간 동안 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반란 행위 이외에도 독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폴란드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결국 이로 인해 폴란드인들의 원망을 받은 독일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폴란드 전토와 새로 폴란드가 얻은 독일 동부 영토에서 독일 본토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독일계였음에도 폴란드에 충성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과 남쪽 국경선에서 치고 올라오는 슬로바키아 괴뢰군의 공세까지 동시에 방어해야 했다. 폴란드군의 대부분은 독일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급히 후방으로 후퇴하였고, 독일의 예상 포위망에서 상당수의 폴란드 병력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독일군은 당초 자신들이 계획한 포위망보다 더 거대한 제2의 포위망을 형성하여 폴란드군을 에워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lbstschutz_leaders_in_Bydgoszcz.jpg|width=450]] ▲ 독일계 반란 집단인 자위단(Selbstschutz) 지휘관들. 군복에 달린 패치, 계급장 등을 보면 SS무장친위대 군복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들은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군인과 민간인들을 습격하고 전후 폴란드 민간인 학살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9월 8일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 외곽에 진주하여 바르샤바의 폴란드 방어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3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거의 3주가 지난 28일에 이르러 끝났다. 이보다 약간 앞선 11일에는 [[라돔]](Radom)의 폴란드군이 독일 남부집단군의 맹공을 받은 끝에 항복하거나 소규모 집단으로 분산되어 포위망 바깥으로 벗어났다. 라돔에서는 6만여 명의 폴란드군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12일에는 폴란드 동부의 르부프도 [[페르디난트 쇠르너]] 휘하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 도시는 소련군이 진주한 22일에 필리프 골리코프 휘하 소련군에 항복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land2.jpg|width=450]] ▲ 9월 1일부터 14일까지의 전투 경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